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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타는 기생이 만든 우리
옷-이해윤
한국 영화에 옷을 입히다.
변압기를 써야 돌릴 수 있는 브라더 미싱과 TV 만한 라디오. 그리고 방안 가득히 널려있던 옷감들. 한 사람의
살림이 그를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일게다. 옷을 짓는 다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행위이다. 천을 잘라, 사람의 몸에 맞게
만들어내는 것이 옷 만들기의 시작이자 마무리인 것이다. 그러나 제 옷이 아닌 남의 옷을 짓는다는 것이 어찌 말처럼 쉬울까. 더군다나
그것이 한 시대를 대표하는 육체, 배우들이 입는 옷이라면 말이다.
이번 <디자인디비>에서는 이 고단한 일을 48년 동안 도맡아 온 사람, 이해윤 선생을 만났다.
48년, 이 긴 시간동안 감독과 배우들의 까탈을 묵묵히 받아내 주고, 그들에게 옷을 지어 입혔던 사람. 만약 '먹여주고, 입혀주는' 것이
어머니의 몫이라면, 우리는 이해윤 선생을 해방 이후 한국 영화를 키워낸 어머니 중 한 사람으로 기억해도 무방하리라. 누더기조차 없었던
한국 영화 의상은 선생의 손을 통해 만들어지고, 수선되고, 하얗게 빨아 널려졌다.
이 인터뷰는 경기도 양평에 자리한 선생의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선생의 작업실은 자그마하고 단촐했지만, 뒤꼍에 놓인
옷 창고 만큼은 당당했다. 수십 년간 그녀가 만들어낸 옷들이 고스란히 모여있는 그곳에는 작업 중에는 자식에게 밥 달라는 소리도 못하게
했다는 선생의 괴팍스런 고집과 애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녀는 옷을 짓는 사람. 옷감과 미싱만 있다면 어디에서라도 제 밥벌이는 할
수 있는 옷쟁이었다.
영화 의상? 정년퇴직도, 해고도 없을 것 같아 시작했어...
우선 선생님께서 영화계와 인연을 맺으신 계기부터
여쭙는게 순서일 듯 합니다. 그때가 55년인데, 유현목이 <춘향전>(1955, 이규환 감독) 조감독
할 때거든. 백호빈이랑, 유현목이랑 막 영화계에 들어가 헤멜 때지. 유현목이하고는 학창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그네들이 한번은
“영화 촬영하는 거 구경이나 좀 나오라”고 해서 낙산에 놀러갔었어. 근데 별안간 출연하라고 그러는 거야. 변사또 행차하는 장면이었는데
그냥 말 타고 지나가기만 하면 된다면서. 원삼에 족두리까지 쓴 기생 역할이었는데, 나 말고는 모두 열여덟, 열아홉 살짜리 국악원 애들이었어.
나는 나이가 많아 안 된다고 하니까 노기(老妓)도 있다며 우겨서 하는 수 없이 찍었지. 그랬더니 백호빈이가 와서 자기가 조감독하는 영화도
나와달라고 해서 한 작품 더 했어. 그게 <자유전선>(1955, 김홍 감독)이야. 거기서는 월남가족으로 나왔지.
그렇다면 배우로 입문하신 셈인데요, 영화 의상으로
방향을 바꾸신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나요? <자유전선>을 찍고 나서 필름을 보니까 먼 산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자꾸 눈을 깜빡이더라구. 그래 “야, 배우는 안되겠다” 싶었지. 그랬더니 배우 김일해씨가 분장을 해보라고 가르쳐줬어. 그이가
일본에서 분장을 좀 배웠었나봐. 당시만 해도 배우들이 분장도 하고 그랬거든. 그런데 분장을 하다보니 남자들 얼굴을 만져야 되는게 그렇게 싫더라.
그래서 의상을 해보면 어떨까하고 생각했지. 영화계에 남아있는 게 평생직업으로는 괜찮겠다 싶었거든. 정년퇴직도 없고, 해고도 없을
것 같고. 죽을 때까지 여기 엎드려 있겠다, 하는 마음이었어.
그래서 처음 의상을 맡으신 작품이 56년
<단종애사>셨지요? 첫 작품의 작업 방식은 어땠나요? <단종애사>를 맡게된 건 임운학 선생
덕분이었어. 그분이 자꾸 <물레방아>(1956, 이현 감독)에 출연을 하라는 거야. 내가 “죽어도 못하겠다”고 버티니까 그럼
<단종애사>(1956, 전창근 감독)에서 니가 원하는 의상을 해보라고 해. 세상에. 의상에 ‘의’자도 모르는 나한테 말이야.
그래서 수염 뜨고, 망건에다 상투다는 것으로 시작했어. 지금도 상투는 망건에다 달지? 그게 그때 우리가 개발한 거야. 임운학
선생하고 나하고 머리카락을 사와가지고 잿물에 넣어 삶고... 그걸 일일이 다 떴어. 초짜가 의상을 맡았으니 연출부 애들이 고생 많이
했지. 나중에 서울예술대 학장하던 김기덕이도 그때 애 많이 썼어.
임운학 선생은 감독이자 배우셨고, 선생님은 이제 막
의상 일을 시작하신 초보셨는데 일이 돌아간 것을 보면 당시에 영화 의상을 담당하는 전문 인력은 없었나봐요?
그렇지. 나도 전혀 디자인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잖아. 난 전문학교에서 회계 공부를 한 사람이야.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
의상은 ‘바느질집’이라고 동네에서 그냥 한복 해주던 집에서 주로 맡아서 했거든. 연출부에서 “이렇게 이렇게 해주세요”하면 그냥 그대로
만들어대는 방식이었다구. <단종애사>에서 의상부를 둔건 예외적인 거였어. 그러니 자연히 내가 의상분야의 대가가 되야겠다, 뭐
이런 생각은 있지도 않았지. 영화 의상에 대한 개념이 없던 때니까.
<단종애사>때는 의상 스탭은 선생님과
임운학 선생, 이렇게 두 분이셨나요? 스탭이랄게 뭐 있나. 그냥 나하고 임운학 선생이 만들고, 우리 어머니하고
이모가 바느질을 잘하셔서 모셔왔었지. 그렇게 네 명이 다였어. 그 영화 끝나고 나서도 고정적인 의상팀을 꾸릴 수는 없었어. 주로 엑스트라
중에서 바느질 할 줄 아는 여자들을 스카웃해다 썼지.
잔금 제대로 받은 기억이 도무지 없어
당시 영화 의상 디자인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조금
더 질문 드리고 싶은데요. 의상 재료들은 어디서 구입하셨나요? 주로 동대문 시장에서 구했는데 그땐 전쟁 직후라서
쓸만한 옷감이 참 없었어. 광목이랑 인조견, 본견, 양단 정도가 전부였거든. 양단은 홍콩에서 수입된 거였어. 그런데 영화 의상이라는 게
비싼 고급재료만 쓴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 첫째로 색이 바래지 않아야 하고, 물에 막 빨아도 염색이 빠지질 않아야 하고. 또 잘 구겨지지
않아야 하고. 이런 조건을 다 갖춘 옷감 구하기가 어려웠지. 그러다 보니 의상 때문에 촬영 못하는 날도 있었어. 소품 담당이 갓끈을
구해왔는데 이게 싸구려 천이라서 까만 물이 빠지는 거야. 하얀 도포에 까만 물이 뚝뚝 떨어지니 난리가 났었지.
그 이후 옷감 재료들은 어떻게
변해갔나요? 그렇지. 60년대로 접어들면서 옷감들은 많이 좋아졌어. 일단 대표적으로 나일론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거든. 그리고서 숙고사니, 갑사니 하는 것들도 시장에 나오고. 조금 더 있으니까 테트론도 나오고 해서 옷 만들기가 편해졌지.
옷>감의 변화가 영화 의상에 미친 영향도 컸을
것 같은데요. 일단 선택의 폭이 넓어지니 좋긴 했지. 그래도 애로사항은 많았어. 일단 한복들은 나일론으로 못
만들어. 너무 반짝거리니까. 또 한복은 좀 빳빳해야 제 맛인데 나일론은 부들부들하잖아. 그렇게 축 쳐진 옷은 또 한국 사람이 못
봐준다구. 인조 공단도 있잖아? 주로 곤룡포나 비단옷 같은데 많이 썼는데 그건 한번 빨면 뜯어서 다시 만들어야 했어. 빨면
우글우글해졌거든. 모본단, 양단 같은 것도 일일이 매번 다림질을 다시 해야 입을 만 했어. 더군다나 인조로 만든 것들은 염색이 잘빠져서
한 번 이상을 잘 못써먹었어. 그러니 얼마나 애를 먹었겠어? 어휴.
어떻게 염색을 했길래 그렇게 색이
빠졌어요? 모르지. 내가 염색까지 어떻게 알아. 그러다가 한 70년도 정도부터는 색이 잘 안 빠지더라. 인조로
만든 것들도 제법 본견같이 보이고.
옷감이 그렇게 속을 썩였다면 조금 비싸더라도 본견을
쓰는 게 낫지 않았나요? 우리나라 영화사 형편이 그게 돼? 배우들이야 자꾸 본견이 더 세밀하고 좋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고. 당시에는 최은희나 김지미 정도만 본견으로 의상을 해 입혔을 때야. 김지미 같은 이는 심지어 악세사리도 진짜 아니면
안 했으니까. 최은희 씨는 그나마 자기 남편이 제작하니까 사정을 아는지 어지간한 거는 그냥 넘어가주고 그랬지.
당시 의상 제작비는 충분히 책정되어
있었나요? 무슨. 지금도 영화 의상하면 그냥 있는 거 갖다 입힌다고들 생각하는 이가 많은데. 그때는 더했어.
<단종애사>만 해도 3년이 걸렸는데 영화 끝나고서는 한 푼 못 받았어. 그냥 옷으로 다 받았지. 그 옷들을 고등학교
연극경연대회에 빌려주고 대여료 받은 게 다야.
선불로 받고 시작하는 게
아니구요? 그때는 이런 식이었어. 시작할 때는 계약금을 받고, 한 반쯤 찍으면 중도금을 준단 말이야. 그리고 다
끝나면 잔금은 다들 떼먹어. 잔금이 다 치러지지 않으면 촬영을 안 하겠다, 이렇게 나오면 연수표를 끊어줘. 그런데 그건 촬영 끝나고 나면
반드시 부도가 나. 우린 그렇게 살았어. 남들은 내가 대한민국 돈은 다 벌은 줄 알지만.... 다만 신상옥 감독은 좀 달랐어.
그이하고 일할 때는 매달 6만원씩 월급을 받았지. 제작부장도 2만원 받을 때인데 말이야. 신상옥 감독은 의상이 영화에서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았던 사람이야. 그래서 옷감 사러 같이 다니기도 많이 했지. 둘이 장보러 나서면 회사에서 아주 싫어했어. 비싼 것만 끊어오니까.
고증을 따지면 무슨 기록 영화 찍느냐고 비아냥대
선생님께서는 첫 작품에서부터 꾸준히 전통의상을
제작해오셨는데요.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삼국시대까지 아우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전통의상에 대한 고증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궁금합니다. <단종애사> 찍을 때만해도 운현궁에 상궁 할머니들이 계셨어. 그분들이 실물도 보여주고,
전통적으로 바느질 하는 것도 가르쳐 주시고 했지.
그러면 주로 조선 말기 옷을 보고
배우셨겠네요? 그렇지. 엄밀히 말하면 단종 시대 옷은 아니었지. 그래도 그냥 그렇게 했어. 당시는 사극 붐이
일었을 때야. 이 영화, 저 영화 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그래도 규장각이니 비원이니 다니며 이 책, 저책 구해보기도 했어.
<조선왕조실록>도 보고.
1973년 석주선 교수가 <한국복식사>를
집필하셨잖아요? 그 이후부터는 고증이 좀 수월해 졌나요? 석주선 교수는 <단종애사> 끝내고서 그이
전시회 일로 한 번 볼일이 있었어. 그 전시회에서 바느질할 사람을 구한다 해서 나도 좀 배울 겸 갔었지.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석 교수
어머님께 배운 건데, 거기서 그 분한테 옛 관복이며 조복 짓는 법을 배웠어. 그분이 일일이 작은 모형을 다 만들어줬거든. 그 이후로는 전혀
접촉이 없었지.
선생님 작업 중 가장 공들여 고증한 것을
꼽으신다면요. 가장 제대로 했다, 이건 잘 모르겠고. 그나마 가장 공들인 것은
<난중일기>(1977년, 변강문 감독)나 <연산군>(1961년, 신상옥 감독) 정도? <난중일기> 할
때에는 갑옷 때문에 무진 고생했어. <왕자호동>(1962년, 한형모 감독) 할 때 연극하는 권희자 씨가 베니아판으로 비늘을 만들어
줬었는데. <난중일기>하면서 생각해보니까 함석을 써도 되겠더라구. 그런데 너무 무겁다고 해서 다시 양은으로 바꿨지. 그거
만드느라고 비원에 있던 구한말 갑옷이니, 경주에 있던 갑옷이니 다 보러 다녔어.
전통 영화 의상의 고증에 있어 가장 어려운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고증보다 영화가 먼저라는 거야. 고증만 따지다 보면 영화 못해.
예를 들어, 조선시대 양반으로 등장하는 이가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고 싶다고 해도 입지 못하는 색이 있거든. 고증으로 보자면 엄연히
양반색, 상놈색이 있는 법이야. 그런대도 영화에서는 그게 또 가능하기도 해.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상상, 창조가 들어갈 수밖에 없어. 또
우리나라의 기록이 그렇게 완벽하지도 않고. 일본은 시대마다, 고을마다 다른 갑옷 형태가 다 기록에 남아 있다구. 또 그렇다고 해서 고증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도 문제야. 옛날이나 지금이나 “고증이 이런 건데요”하면 막 화부터 내는 감독이 있어. 화면만 좋으면 됐지 그걸 뭘 따지느냐
이거야. 무슨 기록영화 찍느냐고 비아냥거리는 감독도 있고.
요즘 영화나 TV 사극을 보면
어떠세요? 엉망이지. 정말 문제야. 특히 텔레비전이 다 망쳐놨어. 대표적인 게 ‘큰머리’야. 왕비건 양반
부인이건 밤낮 번쩍거리며 큰머리 얹고 앉았는데 아주 환장하겠어. 왕비도 누에 칠 땐 소박하게 입고 누에치고, 정경부인도 입궐하거나 그럴 때
빼고는 그렇게 화려하게 입지 않았었거든. 요즘 TV를 보면 그냥 화면에 머리만 왔다갔다해. 또 요즘엔 다 한복 소매가 손등까지 오더라?
일하는 농부건 뭐건. 그럴 땐 손목뼈까지만 와야 바른 거거든. 고증만 고집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렇게 볼 것만 따져서 고증이 아예 사라지는
것도 문제야.
그림만 그려 던져 놓는다고 디자인이 되나
56년부터 지금까지 영화 의상 작업을 해오시면서
특별히 어려웠던 시기가 있으시다면. 내가 영화 의상을 독점한다고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올 때 힘들었지.
그래서인지 한번은 우리집 조카딸년을 데려다가 나 몰래 영화 의상을 시킨 적도 있고, 최인현 감독과 분장사 몇 명이 영화 의상실을 급조해 일을
벌인 적도 있었어. 결국 모두 제대로 일이 끝나지 않아 마지막에는 내가 가서 마무리를 해줘야 했지. 물론 사례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서
말이야.
예전에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씨 같은 경우도
그랬지만, 요즈음 들어 패션 디자이너들의 영화 의상 제작이 더욱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네들이 한 것이 더 이쁘고 좋을지 모르지만 난 잘 모르겠어. 자기가 디자인만 하고 남이 다
만들어준 옷, 난 별로 안 좋아해. 자기 옷은 자기 손을 거쳐야 돼. 그림만 그려서 착 넘겨줬다고 해서 디자인이 아니야. 제
손으로 만져서 제 손으로 고쳐서 해 입혀야지. 하다못해 손으로 한번 쓰다듬기라도 해야지. 내가 의상팀에 일하겠다고 오는 애들한테 늘 하는 얘기도
이거야.
한국 영화 의상의 역사는 결코 짧다고 할 수 없지만,
영화 의상은 아직 디자인의 영역에서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나아지려면 어떤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할까요? 디자인계에서만 그런가, 어디. 영화계도 마찬가지야. 90년대 이전에는 의상쟁이들은 대종상
시상식에도 초대받지 못했어. 대포집 마누라는 초대권을 받아도 우리는 못 받았다고. 이런 상황이 나아지려면 가장 먼저 영화 의상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인력이 나와야 해. 그래서 후배 양성도 하고 그래야지. 영화 한 편 하고 떠나버리는 디자이너만으로는 영화 의상이 발전하지 못해.
나도 시작한지 20년 정도가 지나서야 비로소 영화 의상이 무엇인지 대충 알기 시작했는걸.
마지막으로 영화 의상 디자인을 꿈꾸고 있는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요. 요즘 애들이 당부한다고 그대로 하나. 나두 또 그렇게 당부해도 귀에 들어가게끔
못하니까. 다만 시나리오를 열심히 읽고 작업을 해줬으면 하는 마음은 있어. 대본이 머리 속에 다 들어가 있어야 돼. 특히 사극 같은
경우는. 그리고 영화 의상을 좀 무섭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영화 의상은 100년 후에도 영화와 함께 남아있을 거거든. 이렇게 생각해보면
무서운 일이야.
글,인터뷰_김형진,양효경 / 사진_박정훈 출처_Design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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